땅끝마을이라고 불리는 해남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
이곳에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경치을 자랑하는 대흥사(大興寺)가 있다.
대흥사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이 대둔사(大芚寺)로도 불렸었는데 근대 초기에 들어서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대흥사는 임지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고 하며 그의 의발(依鉢)(불교 수행자의 의복과 식기.)를 보관한 도량이기도 하다.
대흥사에는 서산대사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흔적도 느끼실 수 있는데 바로 대웅전에 걸려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편액과 백설당에 걸린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이다.
한눈에 보아도 확실히 다른 글씨체를 자랑하는 두 편액은 대흥사를 구경하는데 또 하나의 볼거리로 자리잡았다.
‘대웅보전’은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이고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이다.
이 둘은 조선 후기 서예의 양대산맥이었으나 원교 이광사는 연좌로 평생 유배지를 떠도는 신세로 한때는 그의 글씨마저도 폄하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 인물로 후세에는 추사 김정희에게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때는 현종 8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입니다.
추사는 차로 이어진 오랜 벗이기도 했던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립니다.
이 때 추사는 대웅전에 걸려있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체를 보고 ‘조선의 글씨체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원교의 글씨체를 걸어놓을 수 있냐’며 타박하고 촌스러우니 떼어버리라고 했다.
이에 초의선사는 원교의 편액을 떼고 그 자리에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을 달았다.
조선 최대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만 밟고 자란 추사에게 제주도에서의 유배 생활은 그의 삶과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추사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때 다시 방문한 대흥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당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원교의 편액을 다시 대웅전에 달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개성의 차이를 깨닫고 인정 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원교의 ‘대웅보전’은 다시 대웅전에 걸리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흥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추사의 ‘무량수각’은 백설당에 걸려있다.
두 글씨체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편액도 있어 각기 다른 글씨체의 편액을 보는 것도 대흥사를 즐기는데 한 몫 하고 있다.

2015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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